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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32

조선 15대 왕 광해군: 인조반정으로 인한 폐위 조선 제15대 왕인 광해군은 대북계열을 중용하고 정적을 제거하는 데 집착하였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상황까지 만들며 정치적 갈등을 일으켰다. 명과 후금의 전쟁에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외교적인 성과는 있었으나,  숭명배금 노선을 절대적으로 지키는 신료들의 반대로 국가 행정은 마비되었고 결국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났습니다.  [목차여기] 조선 제 15대 왕 광해군 이혼의 배경1575년 6월 14일 ~ 1641년 7월 28일조선의 제15대(재위: 1608년 ~ 1623년) 왕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위치인조반정, 폭군, ▣ 임진왜란  광해군의 이름은 이혼이며, 14대 선조의 둘째 아들로서 임해군 이진의 동생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선조의 첫 후궁인 공빈 김 씨였고, 부인은 판윤 유자신의 딸.. 2023. 10. 19.
임진왜란: 우리 민족 저항의 역사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어난 일본의 침공으로, 우리나라 역사상의 중요한 전투 중 하나입니다. 이 전쟁에서, 끈질긴 저항과 민족의 의지를 바탕으로 일본에 맞서 싸웠습니다. 이순신과 의병들의 활약은 승리의 중요한 원동력이었으며, 명의 원조와 조력도 있었으나 우리 국민의 저항이 가장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목차여기]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까지 일어난 배경부터 결과까지 알아보자!1592년 ~ 1598년까지 2차례에 걸쳐 일어난 전쟁입니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나 '임진왜란'이라 하고,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일어나 '정유재란'이라 합니다. 임진왜란의 배경조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4대 사화를 비롯해 훈구와 사림 간의 정쟁으로 인해 국가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며, 건국 후부터 전쟁.. 2023. 10. 19.
조선 제14대 왕 선조: 왜군에 침략과 당쟁 속에서 국가 회복의 노력 선조는 조선 제14대 왕으로, 명종의 사망 이후 즉위했습니다. 정국을 활기롭게 하기 위해 이황과 이이를 중용하며 노력했으나, 사림들 사이의 파벌과 당쟁으로 인해 국력이 약화되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과 이에 이어 정유재란으로 인해 국가는 황폐하게 되었고, 왜란 이후에도 복구 작업을 진행하면서 국가 회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당쟁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목차여기] 조선 제 14대 왕 선조 이연의 배경1552년 12월 6일 ~ 1608년 3월 6일조선 제14대(재위: 1567년 ~ 1608년) 왕능호는 목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 임진왜란, 정유재란, 행주대첩 이균(본관: 전주) 후에 연으로 바꿈. 중종의 손자로, 덕흥대원군의 세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정세호의 딸인 하동부대부인.. 2023. 10. 16.
이방원과 정몽주: 하여가와 단심가 이성계(태조)가 위화도 회군을 하였을 때 이방원(태종)이 고려 충신 정몽주의 진심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회유하려고 읆은 시「하여가」이며,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하였다. 「하여가」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칡넝쿨이 얽혀진들 그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한평생을 누리니.》 이방원이 정몽주에 생각이 어떠한지를 알아보고 회유하기 위해 읆은 시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우리 모두 오랫동안 잘 살아보자 라는 뜻. 「단심가」 《이 몸이 죽고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방원에 「하여가」 에 대한 답으로 정몽주가 읆은 시이며, 기울어져가는 고려를 지키려는 충심과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다는 신념 보여주는 뜻.. 2023. 10. 15.
훈구파의 대한 도전, 신진 사류들의 숙청: 기묘사화 1519년 중종 재위 때 발생한 사건으로 신진 사림의 세력이 커지면서 훈구파를 배척하였다. 신진사림은 위훈삭제(반정공신들 중 공이 없는 사람이 많다고 하여 훈구파 대신들의 공을 박탈) 사건으로 훈구파를 공격하자 훈구파는 계략을 꾸몄고, 중종도 점점 신진 사류에 급진적이고 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끼고 신진사류를 제거한 사건이다.  [목차여기] 신진 사림의 등장과 훈구파와의 갈등중종은 연산군의 잘못된 정책들을 바로잡으려 노력했으며, 이전 두 차례의 사화로 인해 희생된 사림의 인물들을 등용하였다. 중종의 지지가 있기에 조광조 및 신진 사류들은 성리학에 바탕을 둔 이상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하였고, 기존 훈구파 세력들을 멀리할 것을 요청해 왔다. 현량과(조선 관리 등용 제도)를 설치하여 인재를 등용하도록 하였고.. 2023. 10. 15.
위화도 회군: 4 불가론, 조선건국의 기초 고려 말기, 1388년에 압록강 위화도에서 발생한 정변 사건은 요동정벌군의 장수인 이성계와 조민수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군사를 돌리고 권력을 장악하는 사건으로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렸다 하여 위화도 회군이라고 합니다.  [목차여기] ※ 조선왕조 더 보기 ▣  조선의 1대 왕 개국 영웅, 용장, 명장: 태조 이성계의 위대한 업적 위화도 회군의 배경당시 요동을 점령하고 있던 나하추와 원나라의 잔여 세력은 고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명나라의 압박을 견제하려고 했습니다. 1374년에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한 후에는 명나라와도 우호적인 외교를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1387년에 나하추가 명나라에 항복하면서 명나라는 고려 압박을 시작했고, 1388년 2월에는 영토의 반환까지도 요구하였습니다. 명나라.. 2023.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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