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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네] 지식 창고/역사 이야기

조선 15대 왕 광해군: 인조반정으로 인한 폐위

by 흥부네 수호천사 2023. 10. 19.

조선 제15대 왕인 광해군은 대북계열을 중용하고 정적을 제거하는 데 집착하였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상황까지 만들며 정치적 갈등을 일으켰다. 명과 후금의 전쟁에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외교적인 성과는 있었으나,  숭명배금 노선을 절대적으로 지키는 신료들의 반대로 국가 행정은 마비되었고 결국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났습니다.

 

 

조선 15대 왕 광해군의 배경과 활동사항

 

광해군_영화포스터

 

광해군 이혼의 배경

 

  • 1575년 6월 14일 ~ 1641년 7월 28일
  • 조선의 제15대(재위: 1608년 ~ 1623년) 왕
  •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위치
  • 인조반정, 폭군, 임진왜란

 

광해군의 이름은 이혼이며, 14대 선조의 둘째 아들로서 임해군 이진의 동생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선조의 첫 후궁인 공빈 김 씨였고, 부인은 판윤 유자신의 딸인 유 씨였습니다.

 

 

광해군 이혼의 활동사항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광해군은 국난에 대처하기 위해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왜군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를 모집하고 민심도 수습하면서 국가의 안위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임진왜란이 종료된 이후, 선조가 세자(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넘기려 했으나, 대북파의 지지를 받은 광해군이 1608년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의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다양한 정치적 갈등이 있었습니다. 1613년에는 영창대군을 폐위시키고, 1618년에는 인목대비를 유폐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서인들의 반발이 커졌고, 인조반정에 의해 광해군은 폐위당하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의 통치 기간 동안, 광해군은 국경 방위와 외교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만주에서 신흥국가로 성장한 여진족과 후금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를 훈련하고 국경 방위를 강화했습니다. 명나라와 후금 간의 전쟁에서 중립외교를 성공적으로 시행하고,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등 외교적 활동도 전개했습니다.

 

또한, 광해군은 서적의 간행과 궁궐 조성에도 힘을 쏟았으며, 선혜청을 두어 대동법(세금을 쌀로 내는 제도)도 실시하였습니다.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은 강화도에 유배되었으나, 그의 통치 기간에 일어난 왕권안정을 위한 영창대군과 임해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유폐한 사건의 정치적 갈등은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이러한 갈등과 희생으로 폐비 유 씨, 폐세자 이질, 그리고 세자빈은 폐위 후에 강화 서문과 동문에 안치되었으며, 이질과 세자빈은 자결하였습니다. 광해군은 1641년에 제주도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광해군 이혼의 평가

 

광해군의 폭군 이미지는 그가 부모와 가족의 도리를 무시하고 불필요한 죽음과 낭비를 일으킨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폭군으로 불리는 이유는 숙청만큼이나 중요한 국가 운영을 실패하고, 얻은 권력을 낭비하며 정치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통치 자체가 과잉과 낭비, 그리고 폭정의 형태를 띠었고, 이로 인해 많은 관료들과의 갈등으로 폐위된 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는 광해군에 대한 인식이 일부에서 긍정적으로 변화했습니다. 그는 대동법을 시행하여 백성의 세금 부담을 줄여주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능란한 외교를 펼쳐 국가 안정을 증진하려 노력한 면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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