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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네] 지식 창고/역사 이야기

조선 13대 왕 명종: 수렴청정, 을사사화, 을묘왜변

by 흥부네 수호천사 2023. 10. 12.

조선중기의 13대 왕으로, 1545년부터 1567년까지 재위했습니다. 그의 즉위는 인종의 죽음으로 인해 이뤄졌으며 당시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주도하였으며, 외척인 윤원형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반대파를 숙청하고 인사권을 재정비하는 등 횡포가 심했다. 을묘왜변을 계기로 비변사가 설치되었으며, 문정왕후의 영향으로 불교가 부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정왕후 사후에 선정은 실패로 끝나고, 명종은 3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강릉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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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 13대 왕 명종 이환의 배경

  • 1534년 7월 13일 ~ 1567년 8월 12일
  • 조선의 제13대(재위: 1545년~1567년) 왕
  • 능호는 강릉으로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
  • 을사사화, 을묘왜변

 

본관은 전주, 이름은 이환, 자는 대양이다. 중종의 둘째 아들로 인종의 동생이며,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윤지임의 딸 문정왕후입니다. 비는 인순왕후로 청릉부원군 심강의 딸입니다. 형 인종이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승하하면서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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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 13대 왕 명종 이환의 활동사항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되자,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문정왕후가 명종을 낳았는데, 이때 장경왕후의 동생인 윤임은 김안로와 함께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정왕후와의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1537년에 김안로가 실각하고 윤원형 등이 등용되자 왕위 계승권을 두고 갈등은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일파를 소윤이라고 불렀으며, 양측 사이의 갈등은 치열하게 번졌습니다.

 

인종의 죽음과 명종의 즉위

인종이 즉위하면서 한동안은 윤임 일파가 득세하였지만,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상황은 크게 변하게 되었습니다. 윤원형은 윤임이 조카인 봉성군에게 왕위를 옮길 계획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왕과 문정왕후에게 이들을 사사하라고 강요했습니다. 그 결과, 윤임 일파와 유관, 유인숙 등이 처형되고, 이들의 일가와 사림들은 유배되었습니다.

 

그리고 1547년에는 양재역벽서사건이 일어나 이들의 잔당도 모두 처벌되었습니다. 이렇게 외척 전횡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명종은 윤원형의 세력을 제어하기 위해 이량을 등용했지만, 그 역시 작당하여 정치적 불안과 분쟁의 끝이 없었습니다.

시대적인 동요 임꺽정의 등장

이런 시기에 양주 출신의 백정 출신인 임꺽정이 1559년부터 1562년까지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횡행하였으며, 외로운 왜인들 역시 1555년에 전라도에 침입하는 등 시대적인 동요가 있었습니다.

 

결국 왜구를 퇴치하고 난 후에는 비변사가 설치되었습니다. 비변사는 1510년 삼포왜란 시기에 일시적으로 설치된 것이었으나, 1555년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 기구로 확립되었습니다.

불교 교세의 강화와 몰락

명종 시대에는 문정왕후가 불교를 믿는 독실한 신자였기 때문에 불교의 교세가 강화되었습니다. 그녀는 보우를 신임하여 봉은사 주지로 삼았고, 1550년에는 선·교 양종을 부활시키고 이듬해에는 승과를 설치하였습니다.

 

보우는 나중에 도대선사가 되었으나, 1565년 문정왕후가 사망하면서 승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을 내려가게 되며 결국 변협에게 피살당했습니다. 윤원형 역시 문정왕후의 사망 이후 관직을 박탈당하고 강음에 안치되어 사망하였습니다.

명종의 죽음

명종은 시대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인재를 등용하여 정치를 정상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하고 3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순왕후 심 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순회세자 역시 1563년에 13세로 세상을 떠나며, 왕위는 덕흥부원군의 셋째 아들이 이어받게 되었습니다. 

 

조선 제 13대 왕 명종의 평가

명종은 재위기간이 상당히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위패가 불천위에 모셔지지 않은 이유는 신하들이 그를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임금'으로 인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정은 신하들의 건의와 왕의 수용을 통해 이루어졌으며, 명종은 후대의 신하들이나 임금에게 충분한 존경과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