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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네] 지식 창고/역사 이야기

을사사화: 대윤과 소윤의 대립

by 흥부네 수호천사 2023. 10. 12.

인종 즉위 후 사림은 대윤과 소윤으로 나뉘어지며, 대윤이 득세를 하였지만 소윤측은 큰 박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1545년, 명종 즉위 시기에 윤원형과 윤임 일파 간의 정치적 갈등이 발생하여 대윤이 큰 화를 입은 사건이다.

 

관료들끼리의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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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윤과 소윤의 갈등 그리고 권력투쟁

김안로(문정왕후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유배되고 사사됨)의 실각 이후, 문정왕후 측의 윤원로와 윤원형 형제는 다시 권력의 중심에 올라갔습니다. 정계에서의 권력은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의 친정인 대윤파와 제2계비인 문정왕후의 친정인 소윤파 간의 외척 간 권력 투쟁으로 나뉘었습니다. 장경왕후의 아들 원자 호와 문정왕후의 아들 경원대군 환이 탄생하면서, 윤원로와 윤원형 형제는 왕위 계승을 노리며 경쟁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림은 윤임 일파와의 대립과 알력이 빚어지면서 정계는 긴장과 불안한 상황 속에서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소윤의 정치적 음모

윤원형과 윤원로가 대윤의 지원자인 송인수 등의 탄핵을 받고 계자를 박탈당하며, 문정왕후의 오빠인 윤원로 또한 파직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문정대비를 지키려는 소윤 측에서 대윤에 대한 불만이 커졌습니다. 이 불만은 나중에 문정대비와 인종 사이의 불만으로 번지게 되었습니다.

인종이 즉위한 후 8개월 만에 죽고, 어린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위하자, 문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정계의 형세가 역전되었습니다. 조정의 실권은 대윤에서 명종의 외척인 소윤으로 옮겼습니다.

윤원로는 군기시첨정으로 재등용되었으나, 대윤의 세력을 숙청하려는 시도가 실패하고 파직되어 해남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정대비의 세력을 바탕으로 한 소윤 측의 음모는 계속되었습니다.

윤원형은 윤원로의 책동이 실패하자, 대윤 일파와 개인적인 감정이 있던 사람들을 모아 윤임이 조카 봉성군에게 왕위를 옮기도록 계획하고 있다고 무고하였다.

또한, 궁궐 밖에서는 윤임이 경원대군의 추대를 원치 않아 계림군을 옹립하려고 했다며,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을사사화의 진행과정

이로써 윤임, 유관, 유인숙 등은 반역음모죄로 유배되고 사사되었으며, 계림군 역시 음모와 관련되어 있다고 하여 주살되었습니다. 다른 윤임의 사람들도 이 사건에 휘말려 사형이나 유배를 당하였다. 을사사화가 끝난 후에도 반대파 명사들은 여전히 양재역 벽서(문정대비를 비방하는 뜻의 벽서)가 발견되어 반대파 명사들 중 약 100여 명이 피해(정미사화)를 입은 어두운 시기가 지속되었습니다.

 

결과

을사사화는 겉으로는 외척들 간의 갈등으로 보이지만, 사림파에 대한 훈구파의 공격이었습니다. 1498년 이후 약 50년간 관료 간의 대립이 나타난 사건으로, 을사사화로 막을 내렸다. 사림파는 사화를 통해 큰 손실을 입고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선조 시대에는 서원과 향약을 활용하여 중앙 정권을 다시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사림파는 사화를 통해 생겨난 분파를 기반으로 붕당을 형성하는 등 계속해서 정치적 대립을 이어나갔습니다.

 

※ 조선왕조 더 보기

▣  조선 13대 왕 명종: 수렴청정, 을사사화, 을묘왜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