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기, 1388년에 압록강 위화도에서 발생한 정변 사건은 요동정벌군의 장수인 이성계와 조민수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군사를 돌리고 권력을 장악하는 사건으로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렸다 하여 위화도 회군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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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1대 왕 개국 영웅, 용장, 명장: 태조 이성계의 위대한 업적
위화도 회군의 배경
당시 요동을 점령하고 있던 나하추와 원나라의 잔여 세력은 고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명나라의 압박을 견제하려고 했습니다. 1374년에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한 후에는 명나라와도 우호적인 외교를 추진했습니다. 그러나 1387년에 나하추가 명나라에 항복하면서 명나라는 고려 압박을 시작했고, 1388년 2월에는 영토의 반환까지도 요구하였습니다.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에 최영은 강하게 반발하였고, 우왕은 요동정벌군을 구성하여 조민수와 이성계에게 병력을 이끌고 출진하게 하였다. 출진하고 19일이 지나 6월에 압록강 하류인 위화도에 도착하였는데, 압록강에 물이 불어나 진군을 멈추고 14일을 머물렀다. 이후 이성계와 조민수는 4 불가론을 주장하며 요동정벌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였다.
4 불가론
-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불가하다.
- 여름에 군사를 출병하는 것은 불가하다.
- 명과 싸우는 사이에 왜구가 침략할 것이다.
- 지금은 장마철로 활이 약해지고 병사는 병든다.
그러나 우왕과 최영은 받아들이지 않고 진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성계와 조민수는 어명을 어기고 회군을 하였으며, 급하게 우왕과 최영은 개경에서 반격을 준비했지만 이성계와 조민수는 개경을 함락시키고 우왕과 최영을 사로잡았다.
위화도 회군의 결과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우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은 유배시켰다가 처형을 하였다. 그 뒤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가 조민수를 유배시키고, 우왕의 아들 창왕을 신돈(고려의 승려출신 정치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여 창왕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성계가 완벽하게 실권을 장악함으로써 조선건국의 기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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