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조선 제21대 왕이다. 조선 역대 왕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다. 당쟁의 폐해를 느끼면서 대립 완화를 위해 탕평책을 구사하여 국정 안정을 이루었다. 또한, 균역법실시와 같은 국정운영을 위한 제도 개편과 문물 정비 등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해서도 민생을 돌보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목차여기]
조선 21대 왕 영조 이금의 배경과 업적(활동사항)과 평가
조선왕조에서 유일하게 왕세자가 아닌 왕세제로 왕위에 올랐으며, 30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즉위하고도 52년이라는 세월 동안 집권한 가장 장수한 왕이다.
영조 이금의 배경
- 1694년 10월 31일 ~ 1776년 4월 22일
- 조선의 제21대(재위: 1724년~1776년) 왕
- 능호는 원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
- 탕평책, 균역법, 사도세자, 이인좌의 난
이름은 이금이며, 숙종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숙빈 최씨이며, 비는 정성왕후, 계비는 정순왕후이다. 어머니의 출신이 미천했던 관계로 숙종 후궁이었던 영빈 김씨의 양자로 지내야 했다.
영조 이금의 업적과 활동사항
탕평책(1727)
당쟁에 폐해를 느낀 영조가 실시한 정책으로,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탕탕하고 평평하다)이란 뜻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당파의 치우침이 없도록 한다라는 정책이다. 예를 들어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과 소론과 노론 사이에서도 고르게 등용하여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한 취지이다.
이인좌의 난(1728)
영조의 어머니는 천한 무수리 출신으로, 노론의 세력이 후원을 하고 있었다. 하물며 영조의 아버지는 숙종이 아닌 노론의 세력가 중 하나일 것이라는 소문도 떠돌았다. 그 당시에 소론 중 하나였던 이인좌가 소론 세력과 함께 소현세자의 증손을 추대하는 반란을 일으켰고, 끝까지 영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아 처형된 일이다. 이인좌의 난은 무신년에 일어나 무신난이라고도 한다.
사도세자
영조가 탕평책을 펼쳤다 하여도 영조의 왕권 자체가 노론의 지지로부터 비롯된 것이었기에, 노론위주의 정치 상황은 소론의 불만을 키워가고 있었다. 소론에게 영조의 이복형인 20대 왕 경종의 죽음과 영조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의심이었다. 1755년 영조를 비방하는 글이 나주(나주벽서사건)에 올라왔는데, 영조를 대신해서 대리청정하고 있던 사도세자는 이를 두고 노론의 의견대로 진행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노론과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계략을 꾸며 사도세자를 무고함으로써, 한여름 뒤주 속에 갇혀 8일 만에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외 다양한 업적
균역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낮추어 주었으며, 형벌제도도 정비하고 법률도 정비하였다. 왕도정치를 위해서는 왕이 대신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학문에도 정진하였으며, 그로 인해 학자들을 우대하면서 많은 책이 간행 보급되는 시기였다.
영조 이금의 평가
자신의 아들과의 갈등과 주변 인물들의 모략으로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서 죽인 왕이기에 정신이 잘못되었나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사도세자가 보인 궁에서 궁녀를 살인하거나 궁을 나가는 등의 비정상적인 행동들도 생각하게 된다. 영조가 나중에 후회를 한 것인지, 사도세자에 장자인 정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도 많이 힘들고 쉽지 않았던 시기에 왕도정치와 학문에 정진하고, 백성을 살펴 민생을 안정시켰던 왕이다. 22대 왕인 정조까지 이어지면서, 조선 후기 학문과 문화의 부흥기를 이끌었다고 생각한다.
'[흥부네] 지식 창고 >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22대 왕 정조: 조선후기 개혁과 대통합의 업적 (3) | 2023.11.23 |
---|---|
조선 제20대 왕 경종: 숙종과 희빈장씨의 아들, 소론과 노론의 격심한 정쟁 (3) | 2023.11.18 |
조선 19대 왕 숙종: 환국정치를 통한 왕권 강화 (3) | 2023.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