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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네] 지식 창고/역사 이야기

조선 제26대 왕 고종: 명성왕후와 흥선대원군에 세력다툼

by 흥부네 수호천사 2023. 12. 15.

조선 제26대 왕 고종은 대한제국 초대 황제였다. 명성왕후와 흥선대원군에 세력다툼 속에서 열강들의 침탈 야욕도 심했던 시기였고, 내부적으로는 개화파와 수구파간에 대립도 심해지며 많은 어려움이 있는 시기였다.

 

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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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6대 왕 고종 이희의 배경과 활동사항

고종 이희가 나이가 어려 수렴청정하다가 흥선대원군이 대정을 협찬(종친이 조정의 정치에 간섭)하는 명분으로 대원군에 10년간의 집정시대가 열린다.

 

고종 이희의 배경

  • 1852년 9월 8일 ~ 1919년 1월 21일
  • 조선의 제26대(1863년~1907년) 왕
  • 능은 홍릉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
  • 임오군란, 갑신정변, 을사조약, 갑오개혁, 을미사변(명성왕후 시해), 강화도조약, 운요호사건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조약: 강화도 불법 침입, 조선 침탈의 시발점

1875년 일본의 군함이 강화도를 불법으로 침입한 사건으로 군함의 이름이 운요호이기에 운요호 사건으로 불리며 이 사건으로 인해 강화도조약 체결과 일본의 조선 침탈의 시발점이 되었다. 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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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명성황후 민씨 암살(시해) 사건

을미사변은 조선을 갖고 싶은 일본이 걸림돌의 원인을 명성황후 민씨라고 지정하고, 1895년 조선의 주재하고 있는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하에 일본군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칼로 찔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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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희이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여흥여대부인 민씨이다. 비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명성왕후이다.

 

 

 

조선 제25대 왕 철종: 강화도령, 엉겁결에 왕이 된 농부

조선 25대 왕으로, 24대 왕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게 되면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명으로 강화도에서 농부로 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19세에 왕위에 올랐다.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다가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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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7대 왕 순종: 조선시대 마지막 왕, 대한제국 2대 황제

조선 제27대 왕이자, 대한제국 2대 황제다. 또한 조선시대 마지막 왕이며,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였다. 실권이 없었기에 매국노들에 나라를 빼앗기는 수모를 겪으면서 일제강점기를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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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이희의 활동사항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게 되면서 대왕대비 조씨와 흥선군이 흥선군에 둘째 아들을 다음 왕으로 결정

1866년

여흥 민씨 집안의 딸(명성왕후)과 혼인

1872년

성인이 된 고종이 직접 정치 주관하면서 흥선대원군에게 주어졌던 권한 회수하였고, 조정은 민씨 가문이 장학하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펼쳤다면 민씨 가문에 대신들은 개방 정책을 받아들였다.

1876년

일본과의 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였는데, 이런 상황을 틈타고 일본이 점점 정치적/경제적인 부분을 침식하고 있었다. 내부에서는 개화파와 수구파간 대립이 거세졌다.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은 결국 1882년 임오군란과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1882년 임오군란

신식 군대와의 차별에 분노한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난

1884년 갑신정변

개화파가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독립과 개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

1894 ~ 1896년 갑오개혁

동학농민운동을 제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고 일본군도 군대를 파견하였다가 일본의 욕심으로 인해 청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는데, 일본군은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민씨 일가와 고종의 권력을 빼앗고 친일 정부를 세워 국정개혁을 단행하였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배제된 채 3번의 개혁으로 정치, 군사, 경제, 사회 전반적으로 많은 개혁이 단행되었지만 일본 주도로 이어진 개혁이었기에 미흡한 부분이 많았었고, 일본의 조선 지배를 공고히 하고자 명성왕후를 시해하는 등의 을미사변과 같은 극단적인 일도 발생했다.

아관파천

을미사변 이후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왕세자와 함께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하여 약 1년간의 피신을 하였는데, 당시 러시아를 아라사로 표기하여 '아관파천'이라 불렀다.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우위를 점하자 대한제국을 보호국으로 삼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1905년 일본은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였다.

을사오적

을사조약 체결 압박 당시에 고종의 반대로 인하여 체결이 미뤄지자 일본은 조선의 대신들과 회의를 열고 조약 승인을 받았는데, 이때 찬성한 대신이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으로 이를 '을사오적'이라고 한다.

1907년

외교권을 박탈당한 고종은 한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제 기관에 호소하였지만, 일본과 영국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다. 이후에는 이완용과 송병준 등의 일본 매국 대신들과 일본이 고종이 한일협약을 위배하였다고 강요하여 퇴위하게 되었다.

 

고종 이희의 평가

조선 말기에 국가 상황은 파탄이 난 상태였고,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은 조선이 붕괴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고종도 비범한 인물은 아니었던 것이 시대적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권력 유지에 급급했기에, 유용하게 이용하지 못하여 일본과 매국 대신들에게 위협받고 물러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고종이 비범하여 상황을 유리하게 끌고 갔었다고 하더라도 조선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