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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네] 지식 창고/역사 이야기

소파 방정환: 어린이날의 창시자, 성장 배경과 업적, 일대기 요약

by 흥부네 수호천사 2024. 4. 13.

방정환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아동문화운동가, 어린이 교육인, 사회운동가이며 어린이날의 창시자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아동 및 청소년의 인권을 연구 진흥시킨 선구자이며, 아동교육과 아동문학의 상징이 되는 작가들 중 하나이다. 소파 방정환의 성장 배경과 업적, 일대기를 정리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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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방정환의 배경

  • 출생과 사망: 1899년 11월 9일 ~ 1931년 7월 23일(31세)
  • 직업: 아동문학가,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
  • 학력: 일본 도요 대학교 철학과 중퇴
  • 종교: 천도교

 

방정환은 1923년 어린이의 인격 및 행복 추구를 위해 기념하기 시작하였고, 그때 시작한 어린이날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본관은 온양이며, 호는 소파를 사용하고 31세라는 이른 나이에 오랜 질병과 과로로 인한 신장염으로 사망하였다.

 

 

방정환재단

비영리 공익법인, 방정환 사료편찬 및 연구사업, 어린이 청소년 문화 예술 교육사업, 나눔사업

children365.or.kr

 

 

 

소파 방정환의 일대기

방정환은 고조부 방우구 때까지 의관, 무관 등을 세습한 전형적인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지역 유지 집안이었다. 지금 시대로 치자면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 덕에 동네에서도 골목대장이었다고 한다. 7살이 되던 1905년에는 신식교육을 가르치던 보성소학교에 입학을 했다.

 

1907년 집안에 사업이 실패하면서 초가집으로 이사를 가기도 하고, 식량도 빌려야 할 정도로 금수저에서 흙수저로 전락하였다. 1908년에는 10살의 나이로 '소년입지회'를 조직하여, 동화 구연과 토론회, 연설회 등의 활동도 하였다.

 

1913년 이광수가 펴내던 잡지 <청춘>에 보낸 글이 실리면서, 문학사 연구자들은 방정환의 정식 등단을 1913년으로 해석하고 있다. 1913년 관립미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린상업학교를 입학하였으나, 2년 만에 중퇴를 하였다. 이 시기에 방정환은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금융노동자가 될 것인지? 아동문학가가 될 것인지? 많은 고민을 하였다.

 

1916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필사 업무를 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 천도교 기관에서 일했었는데,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천도교의 '인내천 사상'에 많은 공감을 하였다고 한다.

 

1918년 천도교 3개 교주인 의암 손병희의 3녀 손용화와 결혼을 했으며, 청년문학단체인 '청년구락부'를 조직하였다. 장인의 권유로 보성전문학교 법과(현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도 하였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여,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하다가 일본 경찰이 들이닥치자 등사기를 우물에 던져 넣어 위기에서 벗어난 적도 있다. 이후부터는 방정환은 위험인물로 분류되었고, 고등계 형사들의 끊임없는 감시를 받았다.

 

1919년 말에는 도쿄로 유학을 갔고, 1920년 토요대학 철학과에 입학해 아동문학과 아동심리학을 공부하였다.

 

1920 ~ 1923년 사이에는 천도교 잡지인 <개벽>에 사회주의 성격의 우화들과 사회주의자가 쓴 글들도 연재를 하였다.

 

1921년 유학을 하면서 영어 동화들을 번역했으며, 다작을 번역하는 동안 본인도 많은 소설을 썼다. 또한, 신문사와 잡지사에 수필도 많이 기고했다.

 

1921년 김기전과 함께 서울에서 '천도교 소년회'를 만들고, 전국 순회공연을 통해 이야기꾼으로 활약했다. 이야기의 내용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인격을 존중하자'는 것이었다. 실제로 '어린이들에게 존댓말을 사용하자!'는 캠페인도 하였다.

 

 

1923년 어린이 잡지인 월간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유례없는 인기를 누린 월간 <어린이>는 많은 읽을거리 외에도 보드게임과 같은 즐길거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1927년 전국의 어린이 단체를 통합한 '조선소년연합회' 위원장도 역임을 했고, 외국어 동화 번역과 전국을 돌면서 동화구연도 하였다. 그를 감시하던 고등계 형사였던 미와 와사부로는 방정환을 평가한 글도 있다.

"방정환이라는 놈, 흉측하지만 절대 미워할 수 없는 놈이다... 그놈이 일본 사람이었다면 나 같은 경부 나부랭이한테 불려 다닐 위인은 아냐... 일본 사회라면 든든히 한 자리 잡을 만한 놈인데... 아깝지 아까워."

 

1931년 너무 열성적으로 활동하여 건강을 돌보지 못했고, 흡연과 폭식 등에 나쁜 습관까지 더해 고혈압과 신장염이 악화되었다. 결정적으로 동아일보의 <신동아> 창간으로 인해 <개벽> 판매가 저조해지고 빚까지 지면서 스트레스가 겹치면서 같은 해 7월 9일에 사무실에서 쓰러졌고, 입원 2주 뒤인 7월 23일에 31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소파 방정환의 대한 평가와 논란

1980년에는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포장이 추서 되었고,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 되었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 묘가 있으며, 일반적인 봉분이 아닌 돌무덤 형태이다. 현시대에서도 방정환의 업적은 아동문학과 운동으로 큰 획을 그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의 방정환은 엘리트 여성으로 알려진 김명순에 대해 비판을 하고 유언비어를 퍼트려 구속되어 구금도 된 적이 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여성혐오에 대한 칼럼을 기고하고, 익명으로 활동하면서 신여성에 대한 불만과 열등감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남성 문인들의 여성 비하와 폭력적인 행태는 남성 중심적 사회에 대한 생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