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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네] 지식 창고/역사 이야기

고려의 명장 강감찬 장군: 귀주 대첩, 고려-거란 전쟁과 업적

by 흥부네 수호천사 2024. 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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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명장이었던 강감찬 장군은 서북면행영도통사, 상원수대장군,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고려시대 전기의 문신이다. 요나라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자 상원수대장군으로서 귀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귀주대첩이라 불리는 이 큰 승리 이후 요나라(거란족)와 평화적인 외교관계가 형성된다. 

 

강감찬 기마상

 

고려의 명장 강감찬

 

  • 출생과 사망: 948년 12월 27일 ~ 1031년 9월 15일
  • 고려 전기에 서북면행영도통사, 상원수대장군, 문하시중을 역임한 문신
  • 어린 시절 이름은 강은천, 과거 급제 이후 강감찬으로 개명
  • 본관은 금주, 경주에서 금주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왕건을 도와 후삼국 통일에 이바지한 삼한벽상공신 강궁진이다.

 

 

출생과 관직 생활의 시작

 

948년 12월에 지금의 관악구 낙성대인 금주에서 태어났다. 강감찬이 태어난 설화로는 어머니가 여우인데, 강감찬의 아버지 강궁진이 태몽을 꾸고 나서 여인으로 둔갑한 여우를 만나 관계를 맺고 강감찬을 낳았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983년 문과에 장원 급제한 나이가 36세로 조금은 늦은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로도 1009년까지 고려사에 강감찬에 대한 내용은 언급되지 않다가, 1010년 제2차 고려 거란 전쟁 때 항복을 반대하는 인물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제2차 고려-거란 전쟁(2차 여요 전쟁)

 

1010년 요나라(거란)의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삼아 40만 군을 내세워 서경(오늘날의 평양)을 침공하였다. 고려의 왕인 현종은 강조에게 30만 군을 주어 막게 하였으나 크게 패배하였다. 이때 거란족에 항복하자는 다른 중신들을 물리치고 강감찬은 몽진(일보후퇴)을 주장하고 관철시켰다. 이후 현종이 화친하고 친조 하겠다는 서신을 보내 거란군은 물러가게 되었고, 후퇴하는 거란군을 뒤에서 기습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 강조의 정변: 1009년 강조가 목종을 폐위시킨 정변으로,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이 시발점이 됨.

 

 

제 3차 고려-거란 전쟁(3차 여요 전쟁)

 

1018년 요나라(거란족)는 현종이 친조 하지 않은 상황과 강동 6주를 구실 삼아 10만 대군을 이끌고 전쟁을 시작하였다. 강감찬은 상원수대장군이 되어 20만 대군을 이끌고 부원수 강민첨 등과 함께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흥화진 전투에서는 1만 2천여 기병을 매복시키고,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군이 도달했을 때 막아놓았던 냇물을 푸는 전술로 거란군을 크게 물리치기도 했다. 이렇게 각지에서 패퇴하던 거란군을 추격하여 귀주에서 섬멸하였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고 한다.

 

귀주대첩

 

귀주대첩으로 거란족은 침략을 포기하게 되었으며, 평화적 외교가 성립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후 강감찬은 공로를 인정받아 1031년에는 문하시중(왕을 보좌하며 국정의 중대사를 논하는 관직)에 오르고, 특진검교태사 시중 천수군개국후(국가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수여하는 5등작 중 두 번째)에 봉해졌다.

 

 

평가

 

강감찬은 키도 작고 볼품없이 수수하게 하고 다녔기에 사람들은 그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지만, 나라의 중대사를 논할 때에는 사람이 정반대로 변할 만큼 정색하고 일에 임하여서 나라의 주춧돌이 되는 인물이었다. 고려 거란 전쟁 이후 나라의 풍년이 들었는데, 이게 다 강감찬 장군의 공이라고 칭송하였다고 할 정도로 영웅으로 표현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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