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은 삼국 시대 백제 말기의 장군으로 황산벌 전투에 참전한 장수이다. 전장에 나아가기에 앞서 처자를 모두 죽이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것을 다짐했듯이 충절(충신)의 표본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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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시대 백제 장수 계백
출생과 사망
출생 미정이고, 사망은 660년 8월 20일 황산벌 전투에서 사망(추정 나이 30대)
관직
백제의 고위 관직인 달솔(백제 16 관등 중 2등급)이라는 문인 관직에서 활동하였다고 알려져 있음.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성 출신이며, 이름은 승이고 성은 부여씨였다고 전해진다. 역사기록으로도 황산벌전투 이전에 기록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충절의 표본
660년 나·당 연합이 신라는 육지로 당나라는 바다를 통해 백제를 공격하였다. 죽음을 각오한 5천의 군사가 있었으나, 수적 열세 및 전황은 절망적으로 흘러가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에 패하게 된다면 노예로 전락할게 뻔한 처자식들에게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쾌히 죽는 게 낫다'라며 모두 자신의 손으로 베었다. 후에 가족을 잊어버리면 전투에 유리하다는 병법의 가르침을 들어 행동했다는 내용도 나오면서 계백의 대해서 백제의 충신은 계백 하나뿐이다라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황산벌 전투에서의 활약
660년 당나라 소정방이 13만 수군과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지휘하는 5만 육군으로 백제를 침략했을때, 계백은 충상의 지휘아래 군사 5천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군과 대립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으나, 계백은 월나라 왕 구천이 5천의 군사로 70만 대군을 물리친 일화로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백제군은 3군데로 나누어서 진을 치고 신라군의 공격을 4차례나 격파하였는데, 이에 신라군은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의 아들 반굴이 일기토라고 하는 1인 돌격술을 진행하여 전사하였다. 다음으로는 신라의 좌장군이었던 김품일의 아들 관창이 나섰지만 사로잡혔다. 계백은 어리지만 기품도 뛰어나고 용맹스러운 관창을 돌려보냈는데, 다시 돌격해 오는 관창을 잡아 처형을 하였다.
관창의 죽음으로 신라군의 사기가 오르면서 신라군과 백제군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면서 백제군 5천 중 20명만 살아남고, 4980명과 계백 장군은 전사하였다.
왜 계백장군은 신라군 5만 명을 5천 명으로 상대했을까?
삼국사기에서는 백제의 대부분의 군인들은 당나라 수군을 이끄는 소정방을 상대하였기에, 백제의 주력군은 당나라를 상대했던것으로 보인다. 계백에게 주어진 5천의 군사는 백제에서 내보낼 수 있는 최대한의 규모였다고 보인다. 실제 역사에서도 백제군의 사망자가 만 명의 육박한다는 걸 보면 백제군의 규모는 최소 몇 만 명은 있었던 걸로 보인다. 백제가 멸망하고 난 이후에 백제의 많은 백성들이 당나라로 끌려간 역사를 봐도 당나라의 힘이 엄청난 규모였다는 걸 보여주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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