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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네] 지식 창고/역사 이야기

원효대사 해골물: 삼계유심, 일체유심조-마음먹기에 달렸다.

by 흥부네 수호천사 2024. 2. 3.

원효대사 하면 해골물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어느 시대냐 뭘 했던 사람이었냐 보다 그냥 옛날 승려였고, 원효대사 해골물로 인한 일체유심조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는 정도일까? 오늘은 원효대사에 대해서 출생부터 깨달음의 시간과 사망, 그리고 삼국시대에 끼친 영향까지 알기 쉽고 간략하게 알아보겠다.

 

원효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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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

출생과 사망: 617년(진평왕 38년) ~ 686년 4월 28일

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성을 설씨 

원효는 법명이며, 아명은 서당 or 신당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출생하였고, 출신이 확실하지 않지만 뼈대 있는 집안이라고 추측되며 왕족(진골)은 아님

 

원효대사의 어린시절

어머니 조 씨가 유성이 품속으로 드는 것을 보고 원효를 임신하였고,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낳았는데 그때 오색구름이 땅을 뒤엎었다고 한다. 태어나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좋았고, 가르치는 스승한테 배울 게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부친 담날과 조부 잉피공의 기대를 받으며 신라의 화랑으로 활동하였다.

출가와 수행

28살 때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충격을 받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기대를 받고 있던 원효의 출가 결심에 모두 반대를 하였으나, 의지가 확고하여 아버지와 조부가 허락하였다. 불도를 닦는 동안에도 총명함과 자질이 드러났다.

 

 

당나라 유학과 깨달음

원효가 34살이 되던 해에 당나라 유학을 결심하고 의상과 함께 떠났지만, 고구려 경비대에 첩자로 오인받아 풀려나기도 하였다. 45살에 다시 당나라 유학길에 올라가던 길에 한 무덤에서 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목이 말라 무심코 마신 바가지에 물이 너무 맛있어서 다음날 확인해 보니 해골바가지에 썩은 물이었다. 깜짝 놀라 토를 하면서 삼계유심의 원리와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닫고 유학을 포기한다.

삼계유심(三界唯心)

세상의 온갖 경계가 다 마음에서 일어난다. 마음은 화가와도 같이 여러 세상의 모습을 그려낸다. 온갖 현상은 마음의 원동력이 되어 생겨남이니 마음 밖에서 이루어짐이 없다. 「화엄경」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 뿐이라는 불교 용어

 

일체유심조

 

혼인

신라의 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이 원효가 거리에서 하는 노랫가락(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주겠느냐,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로다)을 듣고 부인을 얻어 아들을 낳고자 하는구나라고 알아채어 둘째 딸인 요석공주를 맞이하게 하였다. 둘 사이에서 아들도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은 설총으로 한국 유교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사망

원효는 70세의 나이로 경주시 양북면 소재의 골굴사에서 입적(승려의 죽음)에 들어갔다.

 

원효대사가 삼국시대의 끼친 영향

원효의 엉뚱한 일화도 많지만, 불교를 대중화시키고 국민들의 정신을 통합하기 위한 노력에 많은 힘을 썼다. 특히 삼국통일에는 당나라가 큰 역할을 하였는데, 당시 원효는 당나라에 불경들을 해설서까지 편찬할 정도여서 당나라 고승들도 원효를 매우 존경했었다고 한다. 그런 원효의 화쟁사상과 일심사상은 삼국시대에 많은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

화쟁사상

다양한 종파들의 이론적인 대립들을 더 높은 차원에서 통합하려는 불교 사상

일심사상

좁고 작은 것을 보지 말고 넓게 봐라란 뜻으로, 불교의 귀의해 반야에 지혜를 닦아 도달하는 참된 마음(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