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은 법제를 완비하여 '경국대전'과 '대전속록'을 완성하고, 토지의 세습과 관리자들의 부당한 수탈을 막기 위해 관수관급제를 도입하여 민생의 안정을 증진시켰습니다. 또한 사림세력을 활용하여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강화하고, 관학을 진흥시키며 문화와 지식의 발전에도 기여했습니다.
조선 9대 왕 성종 이혈의 배경과 업적 그리고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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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9대 왕 성종 이혈의 배경과 업적 그리고 평가
성종 이혈의 배경
- 1457년 8월 28일 ~ 1495년 1월 29일
- 조선의 제9대(재위: 1469년~1494년) 왕.
- 묘효는 성종(成宗), 능호는 선릉(宣陵)으로 광주(廣州)에 있었는데, 현재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계비 정현왕후 윤 씨의 능과 함께 위치
- ▣ 폐비 윤씨
본관은 전주, 이름은 이혈. 세조의 손자이고, 덕종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영의정 한확의 딸 소혜왕후이고, 비는 영의정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이다. 계비는 우의정 윤호의 딸 정현왕후이다.
성종은 1461년 자산군으로 봉해졌으며 1468년에 잘산군으로 개봉되었습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덕종이 죽자 세조에 의해 키워졌는데, 그의 천품과 뛰어난 능력으로 세조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1469년에 예종이 죽고, 아들이 어려서 정희대비와 대신들이 의논해 성종이 13세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후 7년 동안 정희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고, 1476년에 비로소 친정을 하였습니다.
성종은 즉위 당시 명나라 헌제의 고명을 받았으며, 세조 찬위와의 대립으로 이시애의 난 평정 후 병조판서와 영의정을 역임하고 구성군 이준을 유배시켰습니다.
1474년에는 덕종을 회간왕으로 추봉 하고, 1476년에 공혜왕후가 아들을 낳지 못한 채로 사망하자 숙의윤 씨를 왕비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윤씨가 왕의 총애를 받게 되자 여러 빈을 투기하고 불손한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1479년에 윤씨를 폐하고 1482년에는 사사하였는데, 이것이 뒤의 갑자사화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 조선왕조 더 보기
성종 이혈의 업적
1. 법전 편찬
100여 년 동안의 법령과 규정을 종합하여 편찬한 것으로, 『경국대전』은 세조 때 편찬해서 수차례 개정을 거쳐 1485년 완성하여 배포하였습니다.
2. 법령 완비
1492년에는 『대전속록』을 완성하여 법제를 보다 완벽하게 편찬하였습니다.
3. 농지 관리 개선
1470년에는 토지 세습과 농지 관리자의 부당한 수탈을 막기 위해 관수관급제를 도입하여, 국가가 직접 농민으로부터 조세를 받아들이고 현물로 녹봉을 주었습니다.
4. 지방 행정 개선
1490년에는 지방 조세를 감면하고 왕래하는 군현의 조세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수령과 변장 임명 시 인견하여 지방민의 통치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5. 규정 완화
백성들의 불평과 고통을 고려하여 형벌을 가볍게 하고, 장리의 자손 등에 대한 규정을 완화하였습니다.
6. 사회 개혁
풍속 개선을 위해 재가녀의 자손을 관리 등용에서 제한하고, 형제간 다툼을 막기 위해 다투는 자는 변방으로 추방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7. 사림 정치 균형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근왕세력으로 신진사림 세력을 등용하여 사림 간의 균형을 이룩하고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8. 불교 배척
불교를 배척하고 학문과 교육을 촉진하기 위해 불교 관련 제도를 개혁하고, 경연을 통한 학자들의 토론을 유도하였습니다.
9. 학문과 문화 지원
성균관에 존경각을 설치하고 경전을 소장하며 학문 연구를 지원하였고, 학전과 서적을 나눠 관학을 활성화시켰습니다.
10. 국방 강화
국방에도 신경을 써서 빈번히 침입하는 야인들을 소탕하여 국경을 정벌하고 국내 안전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성종 시기에는 퇴폐적인 풍속과 뇌물, 궁중 내부 갈등도 심하였습니다. 후에는 폐비 윤 씨 사건으로 인해 정쟁에 불씨를 일으켰습니다.
성종 이혈의 대한 평가
왕위 계승 서열 3위로 태어났지만 정희왕후의 지목과 한명회의 지원으로 왕위 계승권을 얻게 되었던 성종(成宗)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성종은 문화적 유산을 가지고 있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어려움 없이 많은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아내인 폐비 윤 씨를 사사했고, 술과 스트레스로 건강도 좋지 않아 39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조선시대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세종과 함께 성군으로 불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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