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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네] 지식 창고/역사 이야기

조선 제10대 왕 연산군: 폭정과 부패

by 흥부네 수호천사 2023. 10.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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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조선시대 제10대 국왕으로, 1483년(성종 14년) 2월에 7세로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러나 12년간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켜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과도한 연회, 사냥, 음행 등으로 인한 폭정을 자행하였습니다. 이러한 폭정과 부패로 평화와 안정을 현저히 해친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인해 폐위되었습니다.

 

 

조선 10대 왕 연산군 이융의 배경과 주요 활동

연산군

 

 

배경

  • 1476년 12월 2일 ~ 1506년 11월 30일
  • 조선시대 제10대 국왕(재위: 1494~1506)▣
  • 무오사화, 갑자사화, 중종반정, 폐비 윤씨
  • 강화도 교동에 안치되었다가 경기도 양주 해촌으로 이장하였고, 부인 신 씨는 1537년 죽어서 같은 곳에 안장

 

연산군은 조선시대 제10대 국왕으로, 1476년 11월 7일에 성종과 중전 윤 씨의 적장자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융입니다. 성종의 맏아들로 태어났고, 어머니는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로 함안 본관의 폐비 윤 씨였습니다.

 

1483년 2월에 단 7세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되었고, 1494년 12월 아버지 성종이 붕어하자 그에 이어 1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한편,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 씨는 1482년 8월에 성종에게 사사당하였는데, 이 사실은 그가 왕위에 올라서고 난 뒤인 1495년 3월(연산군 1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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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활동

 

1. 중앙 정치 변화: 연산군의 즉위 당시, 중앙 정치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삼사(參司)가 중요한 관서로 떠올랐던 것이 그중 하나였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성종 중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성종은 공신과 주요 관직을 독점하며 훈구 대신들의 강력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삼사를 지원했습니다. 이에 삼사는 간쟁과 탄핵을 활발히 수행하며 성종 후반에는 삼사의 영향력이 대신들을 압박할 정도로 커졌습니다.

 

2. 삼사와 왕권 간 갈등: 삼사는 국왕에 대한 간쟁을 주요 임무로 여겼으며, 이로써 왕권을 제약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연산군이 즉위하며 형성된 정치 상황 중 하나였습니다. 연산군은 이 정치적 변화를 불만스럽게 여겼으며, 그의 궁극적 목표는 전제적 왕권의 구축과 행사였습니다. 그는 이 목표에 저해되는 발언과 행동을 '능상(凌上)'으로 규정하고 탄압하였습니다. 이로써 두 차례의 사화와 폭정, 그리고 강제적 폐위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3. 연산군의 충돌과 사화: 연산군은 즉위 직후부터 삼사와 다양한 사안에서 충돌하였습니다. 무오사화 이후 삼사가 위축되고 왕권이 강화되었고, 이러한 결과는 연산군이 국정을 위한 긍정적인 개혁이 아니라 연회, 음행, 사치, 사냥, 민가 철거와 같은 부정적인 지엽적 사안에 소모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대신들 뿐 아니라 삼사도 국왕을 간언 하게 되었습니다.

 

4.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 첫 번째 사화인 무오사화는 국왕과 삼사 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1498년 7월에 김일손의 사초에 세조를 비판하는 내용이 드러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나흘 뒤, 유자광은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에 대한 역심을 담은 글이라고 고발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총 52명이 처벌되면서 종결되었습니다.
  • 두 번째 사화인 갑자사화는 국왕의 폭정과 대신, 삼사 간의 간언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상황에서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의 원인 중 하나는 '능상(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김)'과 관련된 문제였으며, 폐비 윤 씨의 문제가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이 사건은 239명이 처형되는 등 가혹한 숙청이 이뤄진 대규모인데, 외형적으로는 삼사가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대신들도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5. 중종반정과 폐위: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의 폭정은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다양한 관서와 제도를 폐지하고, 민가를 철거하며, 금표를 확대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리고 1506년 9월 2일에는 반정이 일어나면서 연산군은 폐위되고, 강화도 교동에 안치되었습니다. 폐세자 이황 등 4 남도 사사되었으며, 연산군은 11월 6일에 역질로 죽었습니다. 

 

 

연산군 이융의 개인적인 평가

조선 왕조 역사상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폭정과 폭력, 부채와 사치, 국정 소홀, 긍정 평가에 부재막장 폭군이라는 국민들의 고통과 어려움만 남겼다는 생각뿐이 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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