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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네] 지식 창고/역사 이야기

단종과 수양대군: 계유정난의 역사적 의의

by 흥부네 수호천사 2023. 9. 23.

계유정난은 1453년(단종 1년)에 발생한 역사적 사건으로, 단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대신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던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에서 수양대군은 대신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로써 수양대군은 단종의 선위를 받을 기반을 마련하였고, 43명의 협력자를 정난공신으로 삼았습니다.

 

관상 포스터_계유정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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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즉위와 계유정난, 수양대군의 정권 장악

계유정난 역사적 의의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음

문종의 이른 죽음으로 인해 13세의 어린 나이로 단종이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린 왕의 통치를 보조하는 대비인 '수렴청정(垂簾聽政)'이 있어야 하는 관례였으나, 이러한 대비가 없었습니다.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 씨는 단종을 낳은 지 단 하루 만에 산욕열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 후 1441년 세종 23년에 문종은 세자빈을 맞지 않았습니다. 대신, 후궁으로 홍 씨와 양 씨만을 두었고, 혜빈 양 씨는 정치적 발언권이 없었습니다. 정치적 권력은 문종의 고명 대신인 황보인과 김종서 등이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는 문종을 포함한 일곱 대군이 태어났고, 단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아직 확립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서로의 세력 경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두 대군은 성격과 성향이 상이하였습니다. 수양대군은 정치적 야심을 품고 문객을 모으는 반면, 안평대군은 문학과 예술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이로 인해 수양대군은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과 정치적으로 연결되는 것을 경계하였습니다.

 

단종 즉위 초기

고명 대신은 황보인, 남지, 김종서 등이었으며, 권력은 김종서가 주도하는 양상을 띠었습니다. 그러나 황보인은 병으로 인해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였고, 남지는 신병으로 사임하였습니다. 이후 김종서가 좌의정으로, 정분이 우의정으로 삼아 권력을 확대하였습니다. 이 대신들은 문종의 후권을 행사하며 황표정사라 불리는 정계의 여러 인물과 공모하였으며, 종친과 귀족 등을 모아 궁중에서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습니다.

 

당시의 왕권은 상대적으로 미약하여, 진정한 권력은 대신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이어 계유정난의 발발 시점을 살펴보면, 단종 즉위 후 2개월 뒤인 1452년 7월경으로 추정됩니다. 수양대군은 대군으로서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황보인,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을 밀소하고 궁문에서 퇴살시켰습니다. 이로써 수양대군은 정권과 병권을 확보하였으며, 김종서와 같은 협력자들을 정난공신으로 삼았습니다.

 

수양대군의 즉위 기반 마련

수양대군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2년 뒤에는 단종의 선위를 받아 세조로 즉위할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대신들을 살해하는 등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황보인과 김종서 등의 고명 대신들이 야심을 품어 궁중의 권력을 확대하려고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습니다. 이에 대한 관련 문헌인 『단종실록』은 세조 시기에 편찬되어 수양대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내세우기도 했으며, 수양대군은 자신을 창업주로 인식하고자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등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또한, 유교적 비전제 정치를 주장하던 유신들은 황보인과 김종서의 권력 확장을 비판했으며, 계유정난을 계기로 이들과의 갈등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대신들이 단종의 왕권을 실제로 약화시키기 위한 야심을 품었는지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계유정난은 조선시대의 정치적 격변사 중 하나로, 어린 왕 단종의 즉위 시기와 대신들의 권력 투쟁, 수양대군의 야심 등이 얽혀 있는 복잡한 사건으로 역사에 남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