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어난 일본의 침공으로, 우리나라 역사상의 중요한 전투 중 하나입니다. 이 전쟁에서, 끈질긴 저항과 민족의 의지를 바탕으로 일본에 맞서 싸웠습니다. 이순신과 의병들의 활약은 승리의 중요한 원동력이었으며, 명의 원조와 조력도 있었으나 우리 국민의 저항이 가장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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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까지 일어난 배경부터 결과까지 알아보자!
1592년 ~ 1598년까지 2차례에 걸쳐 일어난 전쟁입니다. 1차 침입이 임진년에 일어나 '임진왜란'이라 하고, 2차 침입이 정유년에 일어나 '정유재란'이라 합니다.
임진왜란의 배경
조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부터 4대 사화를 비롯해 훈구와 사림 간의 정쟁으로 인해 국가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으며, 건국 후부터 전쟁 없는 평화로운 상황에서 군사적인 부분도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라는 인물이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그 힘을 바탕으로 조선과 협력하여 명나라를 침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590년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였으나, 일본에 정세를 파악하고 돌아온 통신사들의 의견이 엇갈리게 되었다. 일본에 대한 방비를 해야 한다는 주장과 그럴 필요가 없다는 내용이었으나, 결국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쪽에 무게를 두었다. 이후에 일본은 명나라 침공에 관련해 조선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고 조선을 협박까지 하였고, 급박해진 조선은 군과 시설을 정비하여 대비태세를 갖추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지만 이미 늦은 시기였다. 이 무렵 적의 침공에 대비를 한 인물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유일하였다.
전쟁의 시작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협력이 물거품되자 조선을 공략하기로 하였고, 1592년 4월 무려 30만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침공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북침에 대비하여 장수들을 파견하였지만, 훈련도 안된 병사들로는 역부족이었다. 특히 일본은 신무기인 조총으로 공격하니 조선은 대응자체가 불가였다. 각 지역에서 패전 소식을 들은 선조도 서울을 버리고 평양으로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일본군은 5월 초 서울까지 도달하여 경복궁을 불태웠고, 북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6월 이후 8도 전역에서 의병과 의승군이 봉기하여 적군을 격파하기 시작했고, 10월에는 진주에서 왜군을 크게 격파한 진주성싸움(진주성대첩)도 진주목사 김시민이 왜군으로부터 호남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이후 수군에 활약도 시작되었다.
의병과 수군의 활약
의병이 일어난 계기는 관군의 무능함과 국토 대부분이 일본에 의해 짓밟히고, 죄 없는 백성들이 죽어나가자 동족을 구하고 고향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양반부터 천민까지 너나 할 것 없이 일어났으며, 의병장에 대부분은 전직 관원 출신이었다.
경상도에서 의병을 일으킨 곽재우는 붉은 옷을 입은 홍의장군으로 많이 알려져있다. 뿐만 아니라 각 지역에서 많은 이들이 큰 활약상을 펼치었다. 후에는 의승군(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일어난 승려)도 봉기하여 많은 활약을 하였다.
수군의 활약도 있었는데 경상도 수군(원균, 박홍)의 경우 전쟁이 발발하자 모두 패하여 흩어지게 되었고, 남은 건 전라도 수군(이순신, 이억기) 뿐이었다. 이순신은 첫 번째 출전을 하여 피해 없이 적을 격파하고, 두 번째 출전에서도 거북선을 이용하여 큰 피해 없이 승리를 거두었다. 세 번째 출전에서도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일본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해 학익진을 펼쳐 적들을 격파한 내용으로 그 유명한 '한산대첩'이다.
이렇게 연전연승을 함으로써 일본군은 해전을 기피하게 되었고, 이순신의 해상권 장악은 의병들과 함께 전쟁의 국면을 전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명나라의 지원과 휴전
선조는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지원을 요청하였고, 두차례에 공격을 하여 다시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그 사이에도 권율장군이 이끄는 휘화군과 의승군이 행주산성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격전하여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를 '행주대첩'이라 하며, 진주대첩, 한산도대첩과 함께 삼대첩이라 부른다.
이후 일본군도 위력이 약화되어 후퇴한 상황이었으나, 명나라는 일본군과 화의를 요청했다. 그러나 왜군에 무리한 요청사항은 몇년간 진행된 화의마저 1597년 끝내 결렬되었고, 재차 왜군에 침략이 진행되었다.
정유재란
1597년 일본군에 재침은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졌으나 내륙에서는 그동안 조선도 전쟁준비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결과 일본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수군은 원균의 미숙함과 어리석음으로 패배하고, 장군의 지휘를 빼앗겼던 이순신이 돌아와 배 12척으로 300척에 배를 몰아내는 큰 승리(영화로도 유명한 명량해전)를 거두었습니다. 그 시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회군하기 시작하였고, 일본군을 섬멸하려고 쫓아가다가 이순신 장군은 노량대첩에서 전사합니다. 그렇게 7년간의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결과
임진왜란 후 조선은 엄청난 후폭풍을 맞게 됩니다. 전쟁의 공을 쌓은 인물들은 뒤로한채 선조의 명나라에 대한 원조요청이 전쟁을 승리할 수 있었다는 사상에 빠져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가 더욱 강화되었고, 나라의 중요한 문서들이 불타고 없어져 근간이 흔들리니 신분을 팔아 국가 재정을 충당하였습니다. 문화적으로도 큰 손실을 입었는데, 도자기 기술이 없는 일본은 도자기 장인들을 많이 납치해 갔습니다. 7년간의 전쟁 후 일본을 몰아내긴 하였지만, 조선은 회복하기 힘들 정도의 큰 피해를 보게 됩니다. 너무나도 아픈 전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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