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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네] 지식 창고/역사 이야기

조선 제3대 왕 태종: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을 이룩한 주인공

by 흥부네 수호천사 2023.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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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조선의 제3대 왕으로, 건국 후 국가 고비에서 뛰어나게 활약한 인물입니다. 정도전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며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직접 통치하였고, 광범위한 문물제도를 정비하여 중앙집권을 강조했습니다. 이로써 세종 성세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조선 3대 왕 태종 이방원의 배경, 그리고 업적과 평가

태종 이방원

 

 

배경

  • 1367년 06월 13일 ~ 1422년 06월 08일
  • 조선의 제3대(재위: 1400년~1418년) 왕
  • 묘호(廟號)는 태종이며, 능호는 헌릉(獻陵)으로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 13번지 1호에 위치
  • 고려멸망, 조선개국, ☞ 제1,2차 왕자의난
 

왕자의난, 방원의 난: 정도전의 권력다툼과 왕위 계승

태조 7년 처음 발생했던 왕자의 난이며, 일명 방원(芳遠)의 난 또는 무인정사(戊寅定社), 정도전(鄭道傳)의 난이라고도 한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왕자 간의 싸움인 동시에 정도전 일당과 방원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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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이름은 방원이다. 태종은 조선의 제3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1400년에서 1418년까지입니다. 전주 본관인 그는 성균관에서 수학하며 1383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1388년부터 명나라 파견 중 감국을 맡았고, 1392년에 조선이 개국하면서 정안군으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러나 개혁파와의 갈등으로 군권과 개국공신책록에서 배척당했고 세자 책봉에서도 탈락하였습니다. 1394년 명나라와의 관계 조절에서 활약하여 입명문제 등을 해결하였습니다. 무장 출신인 그는 정치적으로도 활약하며 공양왕 폐위와 이성계의 왕위 승계를 조종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398년, 정도전 일파의 요동 정벌 계획으로 인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정도전과 세자 방석을 제거하며 정치적 실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세자 추대는 사양하고 정안공으로 개봉되었으며, 군사 관리를 강화하기 위해 사병을 혁파하고 삼군부로 통합했다. 또한 정무와 군정을 분리하고 중앙집권을 강조하여 중요한 개혁을 추진했고, 1400년 11월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왕위에 오른 조선 제3대 왕이다.

 

드라마 태종이방원 포스터

 

조선왕조 계보 더 보기

 

 

조선 2대 허수아비 왕: 정종의 통치 업적

정종은 조선 전기의 두 번째 왕으로 1398년에서 1400년에 재위했습니다. 허수아비 왕으로 알려진 그는 왜구의 침략을 무력으로 물리치며 조선 건국 초기에 큰 공로를 쌓았고, 제1차 왕자의 난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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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4대 세종 대왕: 조선 발전을 이끈 위대한 국왕의 업적

세종은 조선의 4대 왕으로, 1418년 6월 왕세자로 책봉 후 8월에 즉위했습니다. 재위 기간은 국가 발전을 이끈 빛나는 시기였습니다. 집현전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의례와 제도를 정비하여 유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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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

 

1. 왕권 강화

  •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을 확립하기 위해 다수의 공신과 외척을 제거했습니다. 1404년에는 이거이 난언사건을 밝혀내고 이거이와 이저를 귀향시켰으며, 1407년에는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를 처벌했습니다. 1409년에는 이무, 윤목, 유기 등을 처단하고, 1415년에는 민무휼과 민무회 형제를 폐하고 사사했습니다. 또한 이숙번도 축출하였고, 잔여 공신들을 은퇴시켜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육조직계제를 도입하고 사전 일부를 하삼도로 이급하였다.

2. 중앙제도 정비

  • 1401년, 태종은 중앙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의정부합좌에 참여했던 삼사, 예문춘추관, 삼군총제 등을 제외시키고 의정부 구성원만이 국정을 합의하게 하는 의정부제를 도입했습니다. 문하부낭사를 사간원으로 분리하였고, 삼사와 삼군부를 사평부와 승추부로 개편했습니다.
  • 1405년에는 의정부 기능을 축소하고 육조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육조직계제를 강화하였고, 육조장관의 지위를 높였습니다. 또한 전곡과 군기를 관장하던 사평부와 승추부를 폐지하고 호조와 병조로 이관시켰으며, 문무관의 인사권을 이조와 병조로 이관했습니다.
  • 또한 대언사를 강화하고 동부대언을 증설했으며, 육조의 사무를 나눠 맡게 하는 조직을 구성했습니다. 육조의 각 조마다 세 개의 속사를 설치하고, 기능에 따라 90여 개 관아를 육조에 분속 시켰다.
  • 1414년에는 육조직계제를 시행하여 왕-의정부-육조의 국정체제를 왕-육조의 체제로 전환하여 왕권과 중앙집권을 강화했습니다.

3. 지방제도 정비

  • 태종은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1413년에 완산을 전주로, 계림을 경주로 변경하였고, 서북면을 평안도로, 동북면을 영길도로 변경하였습니다. 또한 도의 단부관을 도호부, 감무를 현감으로 변경하였으며, 군·현 이름에 있는 '주(州)'자를 '산(山)'자 또는 '천(川)'자 등으로 바꾸어 지방 행정을 재정비하였습니다.
  • 1417년에는 평안·함길도의 도순문사를 도관찰출척사로, 도안무사를 병마도절제사로 변경하였고, 풍해·영길도를 황해·함경도로 개칭하여 8도 체제를 확립하였습니다. 또한 1409년에 전라도 임내를 군·현으로 이속 시켜 혁파하고, 향·소·부곡도 군·현으로 이속시켜 소멸시켰습니다.

4. 국방 강화

  • 태종은 군사력을 강화하고 군사 지휘체제를 개편했습니다. 그는 수하병을 갑사로 편입시키고, 의관 중 무예에 뛰어난 자를 별시위로 편성했습니다. 1404년에는 응양위를 설치하고, 1407년에는 내상직을 내금위로 개편하여 왕의 의지로 인물을 등용했습니다. 군사의 지휘체제 개편도 진행되었는데, 삼군부를 개편하고 군기와 군령을 장악하도록 조치했습니다.
  • 군사를 지원하기 위해 지방 군과 유사시인 잡색군을 조직하고, 수군을 강화하였습니다. 해안 방어를 위해 경쾌속선을 만들고, 수군을 강화하고, 거북선을 개발하였습니다. 사법 및 경찰 부문에서도 순위부를 의용순금사로 개칭하여 도적을 방지하고 범죄자를 처벌하도록 했습니다.

5. 토지 · 조세제도의 정비

  • 태종은 양전사업을 통해 전지를 확보하고 군자 보충 및 신권 억압을 위해 사전의 지배를 강화했습니다. 이를 위해 과전법을 개정하고, 사원 · 공신전을 유세지로 옮겼으며, 여러 정책을 통해 전지의 사용을 조절하였습니다. 군자전의 과전 절급을 중지하고 토관의 수를 줄이기도 했습니다.
  • 조세 정책에서는 공처노비와 제주의 공부를 개혁하고, 수조법과 맥전조세법을 도입하여 비축 곡식의 규모를 확대했습니다. 이로 인해 곡식 보관 창고를 증설하여 곡식 저장량을 늘렸습니다.

6. 조세 수송책의 변화

  • 태종은 왜구를 소탕하면서 조세를 배로 운송했으나 조운선의 문제로 1403년에는 육지로 조세를 운송하게 전환했습니다. 1412년에는 전국의 조세를 육지로 운송하도록 입법화하였으나, 경상도를 제외하고 배로 나르도록 변경했습니다. 또한 1413년부터 1414년까지 안흥량을 돌아가는 방법을 모색하고 1417년에는 경기도 사전의 3분의 1을 하삼도로 이급했습니다.

 

7. 산업 장려

  • 태종은 농업을 장려하기 위해 김제 벽골제를 수축하고 국농소를 설치하는 등 농업 발전에 힘을 쏟았습니다. 또한 양잠을 장려하고 상업 정책으로 곡물·우마 교역소를 정하고 상권 감독을 강화했습니다. 광업과 염업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며 어업에도 규제를 가했습니다.

8. 노비제도

  • 태종은 노비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노비쟁송을 제한하고 국역 인구를 확보하기 위해 법률을 제정했습니다. 노비중분결절법, 결송지한, 공사노비소량지한, 단송지한을 통해 노비결송 문제를 해결했고, 사천변정을 통해 노비를 중앙과 지방에 분배했습니다. 종부법을 도입하여 국역 인구를 늘리고 노비 주인의 세력을 약화시켰습니다.

9. 사회정책

  • 태종은 백성들의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 1401년에 신문고를 설치하고 억울한 사건을 상소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또한 1410년에 호포세를 폐지하고 1415년에 포백세를 없애 백성의 경제 부담을 줄였습니다. 또한 의약, 맥리, 침구학을 가르쳐 의료 지식을 확산시켰으며 보충군제를 도입하여 군역을 이행한 노비를 양인으로 승격시켰습니다. 다만, 서얼 차별을 남기는 법률도 시행했습니다.

10. 교육 · 과거 제도의 정비

  • 태종은 유학과 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1404년에는 권근을 책임자로 성균관과 오부 학생을 교육하는데 활용하였으며, 1406년에는 향교의 진흥을 위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또한 권학사목과 국학사의를 제정하고 4부 학당을 건설하여 교육을 강화했습니다. 외학제도를 도입하고 학당 경비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기술 교육을 위한 10 학과 제조를 두었습니다.
  • 과거제도 개혁 측면에서, 1401년에는 문과고강법을 도입하였으나 1407년에는 제술 중시 정책을 채택하고, 1414년에는 관학생을 대상으로 사장시험을 도입하여 제술을 강조했습니다. 1413년에는 예전의 공거와 좌주문생제를 폐지하는 등의 개혁을 시행했습니다.

11. 서적편찬과 간행

  • 태종은 역사서 편찬을 촉진했습니다. 권근과 하륜을 통해 『동국사략』을 편찬하고, 1409년에는 『태조실록』을 편찬했습니다. 또한 1414년에 『고려사』의 개수를 정비하였습니다. 1403년에 주자소를 설치하여 계미자를 수십만 자 주조하였습니다.
  • 1412년부터 1416년까지 다양한 서적을 간행하였는데, 이에는 『십칠사』, 『대학연의』, 『원육전』, 『속육전』, 『승선직지록』, 『동국약운』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또한, 1404년부터 이듬해까지 『도은집』과 『예기천견록』도 간행되었습니다.

12. 대외정책

  • 태종은 궁궐 이전과 동북면 정비, 왜인 관계 정리를 중요시하며 여진과의 강온책을 시도했습니다. 동북면에 경원부를 설치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옮겼습니다. 수도 이전 후에는 창덕궁 · 덕수궁 등을 건설하고 경제체제를 정비했습니다. 왕위 계승과 법제 개혁, 호패법 등을 통해 통치를 강화했습니다.
  • 태종은 왜인과의 관계에서도 무역을 활성화하고 관계를 조절하고 통제하는데 주력했습니다. 또한, 선원록을 통해 왕위 계승 방식을 개선했고, 1418년 방탕한 생활을 한 사실을 들어 장자인 세자 제를 폐하고 세종을 세자로 삼았습니다.
  • 태종은 군사력을 강화하고 대마도 공략을 시행하며 왕권을 강화하는데 기여했습니다. 세종을 세자로 삼고 2개월 뒤 왕위를 물려주었다. 양도하고 난 이후에도 정치에 참여해 군사를 통해 왕권을 지원했습니다.

 

 

 

태종 이방원의 대한 개인적인 생각

 

"천하의 모든 오명은 내가 짊어지고 갈 테니, 너는 어진 임금의 이름을 역사에 길이 남기도록 하라."

태종 이방원이 죽기 직전에 세종에게 남긴 말이라고 한다. 형제를 죽음으로 밟고 일어난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왕권을 획득한 피의 군주라는 평가를 받는 왕이지만 조선왕조의 역사의 위대한 업적을 펼친 세종의 아버지로서 세종이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워 낼 수 있게 만든 피가 아닐까 생각한다.

드라마를 아직 보지는 못했지만 주상욱이라는 배우와 너무 잘 들어맞는 거 같고 지금 포스팅하면서도 태종 이방원이라는 조선의 3대 왕이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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