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에 학문 연구를 촉진하기 위해 설립된 기관인 집현전은 조선 건국 이후 유교국가로서 필요한 유교 의례와 제도의 확립, 대명 사대관계의 정착을 위한 노력으로 세종이 1420년 궁중에 설치했습니다. 이 기관은 도서 수집, 보관, 학문 활동, 국왕 자문 등의 기능을 가졌으며 다수의 우수한 학자를 양성하여 조선 건국의 목적을 이루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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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의 역사와 역할
집현전은 중국에서 비롯된 제도
집현전 제도는 한(漢) 나라 시대부터 존재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 제도가 현대적으로 정비된 시기는 당나라 현종 때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유사한 제도가 삼국 시대부터 도입된 것으로 보이지만, 집현전이라는 명칭은 고려 인종 때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진입하면서도 집현전은 설치되었지만, 나중에 보문각으로 개칭되고 유명무실한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유교국가로서 필요한 유교 의례와 제도를 확립하는 것이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고 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했습니다.
1420년(세종 2)에 집현전이 궁궐 안에 설치
집현전 설치 당시, 학사들의 직위는 영전사(領殿事, 정1품), 대제학(大提學, 정2품), 제학(提學, 종2품), 부제학(副提學, 정3품), 직제학(直提學, 종3품), 직전(直殿, 정4품), 응교(應敎, 종4품), 교리(校理, 정5품), 부교리(副校理, 종5품), 수찬(修撰, 정6품), 부수찬(副修撰, 종6품), 박사(博士, 정7품), 저작(著作, 정8품), 정자(正字, 정9품)로 구성되었습니다. 학사 중에서 제학 이상은 겸직으로, 나머지는 전임학사(專任學士)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로써 집현전의 실무 책임자는 부제학인 행수(行首)라 불렸습니다.
집현전의 전임관 수
집현전 설치 당시에는 10명이었지만, 1422년에는 15명, 1426년에는 16명, 1435년 초에는 22명, 그 해 7월에는 32명으로 늘었습니다. 자격은 문사(文士)여야 했으며, 재행(才行)이 있는 연소한 자가 적임자로 선정되었습니다. 또한 몇몇 명의 서리(書吏)가 배속해 행정 업무를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집현전의 역할
집현전은 주로 학문 연구를 중시하는 기관으로, 다양한 도서를 구입하거나 인쇄하여 보관했습니다. 또한 학사들에게 일정 기간 동안 휴가를 주어 자유롭게 독서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했고, 다른 특권들을 부여하여 학자들이 불편함 없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 결과, 많은 우수한 학자들이 집현전을 통해 배출되었습니다.
집현전은 학문 연구를 중시하는 기관으로서 도서의 수집, 보관, 학문 활동, 국왕의 자문에 대비하는 기능을 갖췄습니다. 그러나 37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집현전은 변화를 거듭하며 3개의 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1기(1420년~1427년)
활발한 활동은 없었지만, 다양한 기능들을 이끌어낼 기틀이 마련되었고, 학문적 수련을 쌓아 자기 계발을 완성하는 시기였습니다. 이때 집현전은 경연관, 서연관, 종학교관, 강서원관, 사대문서, 가성균관직, 사관, 시관, 지제교, 국왕의 사자, 풍수학관 등 다양한 직무를 담당했습니다.
제2기(1428년~1436년)
집현전의 정원이 16명에서 32명까지 확대되었으며, 고제 연구와 편찬 사업을 시작한 활발한 시기였습니다. 고제 연구는 예조와 의례상정소와 함께 하였으며, 집현전의 고제 연구는 주로 의례와 제도의 부분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정치와 제도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정보로 활용되기도 했고, 세종의 시책을 뒷받침하고 명분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편찬 사업은 조선 초기 문화에 크게 기여했으며, 유교 윤리서와 국가의 유교적 의례 제도를 정비하는 데 공헌했습니다. 특히 훈민정음의 창제와 관련된 편찬 사업은 우리나라의 문화유산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제3기(1437년~1455년)
집현전의 정원이 20명으로 축소되고,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전환기였습니다. 이때 집현전 학사들은 첨사원직까지 전담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습니다. 또한, 언론 활동이 활발해져서 언론 기관의 성격을 띠고 정치 활동도 활발해져서 정치 기관화되었습니다. 이로써 집현전은 정치적 변화를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집현전의 마지막
하지만, 세조의 무단적인 왕권 강화 정책과의 충돌로 인해 1456년에 일부 집현전 학사들이 주도하여 단종복위를 도모하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면서 집현전은 혁파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종 시대에는 집현전의 후신으로 홍문관이 설치되었습니다.
집현전은 단기간이었지만, 역사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특히 세조에서 성종 시대에 정치적으로 크게 활약한 자들이 대부분 집현전 출신들이고, 경국대전 등의 편찬 사업에 기여함으로써 조선 초기 문화와 제도 발전에 크게 기여한 학자들을 배출한 장소로 역사적 의의를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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