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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부네] 지식 창고/역사 이야기

원자폭탄의 아버지 천재 물리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 일대기와 주요 업적

by 흥부네 수호천사 2024. 5. 29.

원자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계 최초의 핵무기 프로젝트 맨해튼 계획에 리더였던 천재 물리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출생부터 사망까지 일대기와 주요 업적에 대해서 간략하고 보기 쉽게 알아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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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로버트 오펜하이머 일대기와 주요 업적

오펜하이머는 1904년 4월 22일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1967년 2월 18일 미국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사망하였다. 미국의 이론물리학자이며, 하버드를 졸업 후 영국과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하였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버클리에서 재직하다가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해  맨해튼 계획을 수립하였다. 1950년에는 수소폭탄 제조를 반대하였다가 모든 공직을 잃게  되고, 말년에는 보안청문회부터 시작해서 과학적 혁신과 윤리적 딜레마가 교차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

1904년: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와 화가인 어머니 사이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린시절은 천재 물리학자답게 월등히 뛰어났다고 한다. 특히 화학과 광물표본에 관심이 많았으며, 1등을 놓치지 않는 그의 학업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대인관계는 좋지 않았는데 친구들에게 괴롭힘도 당하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대학생활과 유학

1922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3년 만에 화학 학사 학위를 우수한 성적으로 취득하였고, 이 때부터 물리학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하버드는 유럽에 비해서는 수준이 떨어졌기에 오펜하이머가 원하는 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기로 하였다.

 

1926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실험물리학을 공부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포기하고 독일에 괴팅겐 대학교로 넘어가 이론 물리학인 양자론을 공부하게 된다.

 

1926 ~ 1929년: 괴팅겐 대학교에서 1927년에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당시 천재 물리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루게 되었다. 

 

 

 

오펜하이머의 주요 업적

1929년: 미국으로 귀국하여 버클리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에서 교수직을 맡았으며, 양자 역학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교수직을 맡았을 때 당시 나이가 25살이었다.

 

1930 ~ 1940년: 양자 역학과 양자 전기학부터 많은 논문과 블랙홀에 원리도 알아내었을 정도로 전 세계의 변화를 주고 있었다. 1930년 대 중반부터는 정치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노동조합 등의 적극적인 참여는 주변에 좌익 친구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1940년에는 전 공산당원이었던 카타린 해린슨(키티)과 결혼을 하였는데, 이전 여자친구인 진 테트록도 공산당원이었었기에 2차 세계 대전 후에 오펜하이머가 어려운 상황도 일어나게 된다.

 

1941년: 세계 2차 대전 중 1939년에 아인슈타인과 레오 실라드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독일의 원자폭탄 개발 가능성에 대해 경고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미국 정부도 원자폭탄을 개발을 위한 연구를 시작하기 위해 오펜하이머를 참여시켰다.

 

1942년: 미국 정부는 원자폭탄 개발을 위한 맨해튼 프로젝트를 공식적으로 시작했고,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1943년: 로스앨러모스의 비밀 연구소를 설립하고, 물리학자, 화학자, 엔지니어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아서 원자폭탄 개발을 진행하였다. 우라늄과 플루토늄의 핵분열을 통해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으로, 실험적 검증이 매우 중요하며, 복잡한 프로젝트였다.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에서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인 트리니티 실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하였고, 오펜하이머와 그의 팀은 역사상 첫 번째 핵폭발을 이룩했다. 그 결과물로 나온 원자폭탄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하여 140,000명과 70,000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며,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내면서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키는 결과를 만들었다.

 

 

세계 대전 종식 이후

1947년: 미국 핵에너지 자문위원장을 맡게 되었고, 핵무기의 군비 경쟁에 반대하고 국제적 통제를 지지하였다.

 

1953년: 오펜하이머의 처와 전 여자친구가 공산당원으로 활동하였던 부분이 문제가 되면서, 사상을 의심받기 시작하여 보안청문회도 열렸으나 한 때 좌익의 성향을 갖췄었다고는 하나 충성심을 인정하여 적합한 인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1954년에 핵에너지보안위원회의 인가를 취소하였고, 오펜하이머의 경력에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이후 생에서는 핵에 대한 통제를 주장하면서,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학문적 연구를 지속하면서 여러 강연과 저술활동 등을 하며 지냈다. 1957년에는 해안가의 땅을 구매하고, 휴양도 하면서 물리학에 대한 논문 작성도 지속하였다. 

 

1965년: 담배를 끼고 살았던 오펜하이머는 두경부암(후두암) 진단을 받았고, 1966년 수술까지 하였지만, 좋지 않은 경과로 1967년: 2월 18일 자택에서 62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다.

 

 

사후 오펜하이머의 대한 평가

과학적인 기여는 이론물리학을 크게 발전시켰고, 양자역학과 양자 전기학, 핵물리학 등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로 원자폭탄을 개발하였다. 다만, 원자폭탄이라는 힘으로 평화를 유지시키기에는 힘들 뿐 아니라 핵개발을 이뤄낸 후 그의 입장은 윤리적인 문제까지 제기되고 있다. 오펜하이머도 핵개발 이후에 많은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영화나 다큐로도 나와 있지만, 그의 복잡한 인물상은 흥미롭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