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은 수많은 호족들이 난립하던 신라 말 난세를 평정하고, 후삼국을 흡수하여 한반도 통일을 이룩한 고려왕조의 제1대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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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1대 왕 태조 왕건
- 출생과 사망: 877년 1월 31일 ~ 943년 7월 4일 (66세)
- 재위기간: 918년 7월 25일 ~ 943년 7월 4일
- 능묘: 현릉으로, 북한의 개성시 해선리에 위치
-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 송악(현재의 개성) 출생.
- 아버지는 금성태수 왕융(王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
태조 왕건의 설화
아버지가 용왕의 딸과 결혼하여 왕건을 낳았기에 겨드랑이에 비늘이 있다는 얘기도 있고, 당나라의 황제가 한반도를 유람하다가 얻은 사생아가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이라는 설도 있으나, 왕가의 혈육이라는 설정의 설화인 듯하다.
혼란 속의 싹튼 희망
태조 왕건은 신라시대에 왕권 다툼과 부패가 만연했던 시기에 성장하고 있었으며, 여러 호족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해상을 장악했던 장보고가 사망하면서 호족들은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중에 막대한 부를 쌓았던 왕건의 가문도 있었는데, 당시 임진강 일대를 중심으로 세력을 펼쳤던 궁예와 손을 잡게 되면서 후고구려는 강력한 기반을 가지고 출발하게 되었다.
왕건과 궁예, 엇갈린 운명
왕건과 후고구려(고려) 활약으로 세력이 커짐과 동시에 궁예는 자신을 신격화하고 힘이 커진 호족들과 장수들을 처형하면서 미쳐가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언제 궁예한테 죽을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 왕건과 뜻이 맞는 이들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918년에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의 주인이 되었다.
마침내 통일을 이룩하다!
왕건은 통일의 대업에 다가서기 위해 신라와 후백제 중 전통과 문화가 있는 신라를 껴안고 후백제와의 대립을 선택했다. 왕건은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우위를 보였고, 신라 경순왕은 왕건에게 항복을 결심했다. 마침 후백제 견훤의 아들 신검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견훤을 유폐하고 왕위에 오르는 사건이 발생한다.
견훤은 고려에 망명하고 후백제 타도에 앞장서고, 드디어 왕건은 936년 통일을 이룩하게 된다.
고려 초기 왕권 안정을 위한 다양한 정책
왕건은 초기 안정을 위해 백성들에게 조세를 낮춰주고, 검소를 생활하하며 왕의 모범을 보여줬다. 왕권 강화를 위해 숱한 정략결혼도 진행했는데, 부인만 29명에 자식이 34명이나 되었다. 이는 분명 왕권이 위협받는 일은 없다 할지언정 후에 왕위 다툼으로 인한 양날의 검이었고, 실제로 왕건이 죽은 후에 왕위 간 다툼과 왕권을 노리는 호족들의 세력들도 있었다. 또한, 종교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불교를 수호하는 왕실의 이미지를 만들어 왕권 강화를 극대화하였다. 부인과 자식들이 많아 왕권 다툼과 후손들을 걱정하는 마음에 훈요(타이르고 가르치기 위한 조항) 10조도 남겼는데 아래와 같다.
훈요 10조
-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세웠으므로, 사찰을 세우고 주지를 파견하여 불도를 닦도록 하라.
- 도선의 풍수사상에 따라 사찰을 세우고, 함부로 짓지 말라.
- 왕위계승은 맏아들이지만, 불초할 때에는 중망받는 자에게 잇게 하라.
- 우리나라와 중국은 틀리기에 문화를 따를 필요 없으며, 거란은 짐승과 같은 나라로 의관제도는 따르지 말라.
- 서경은 우리나라의 지맥의 근간이니, 백일 이상 머물러라.
- 신위와 의식절차에 가감을 건의하지 못하게 하며, 군신이 동락하면서 제사를 경건히 행하라.
- 왕이 된 자는 쓴 충고에 귀 기울이고 아첨은 멀리하며, 백성들의 민심을 얻어라.
- 차현 이남 공주강 밖은 산형지세가 배역하니 그 지방 사람들을 등용하지 말아라.
- 모든 관료의 녹봉을 제도에 따라 공적으로 정해주어라.
- 경전과 역사서를 보아 지금 현재를 경계하라.
거란의 적대적이었던 왕건
942년 발생한 만부교 사건은 거란에서 사신을 보내며 낙타 50마리를 같이 보냈는데, 왕건은 발해를 멸망시킨 나라라고 하며 사신들은 가두고 낙타는 만부교 밑에서 굶어 죽게 만들었다. 거란은 고려와 잘 지내고 싶었던 마음이었지만, 왕건은 거란에게 적대적이었다. 후에 작은 분쟁들로 인해 결국 거란은 고려를 침공하게 된다.
왕건의 죽음, 예견된 왕위 계승, 왕건의 대한 평가
부인이 29명에 아들만 26명인 상황에서 왕건의 죽음은 예정되어 있는 왕위다툼에 시작이었다. 943년 왕건은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고, 이후 2대 왕 혜종은 재위 2년 만에 3대 왕 정종도 재위 3년 만에 의문사와 병에 걸려 죽는 등 예견된 상황이 벌어졌다.
왕건에 대해 이어져오고 있는 평가는 모두 자신들만을 내세우는 시대에서 남을 돌볼 줄 알고, 평화와 타협의 자세를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후대에서도 왕건도 사람인지라 완벽할 수는 없었지만, 그를 능가하는 지도자가 있었을까?라고 얘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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